한 잔씩 먹으니 술도 맛있다
비주류
난 술을 즐기지 않는다. 이 사실은 ‘우리 애가 친구를 잘못 만나서…’라는 핑계처럼 직장생활에서 경쟁자들에게 밀릴 때마다 좋은 핑계거리였다. 내가 일은 잘하는데 술을 못해서 이렇게 평가를 제대로 못 받는다는 식의 핑계였다. 짜여진 판에서 상사의 눈에 띄게 업무를 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부장 같은 경우 실무와 괴리된 경우가 많아서 눈에 띄려면 회식 자리가 중요했다. 실제로 어떤 부장은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술을 잘 마시는 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야.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일도 잘 해. 그래서 넌 주류야 비주류야?”
당시 난 주량으로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 짓는 기준때문에 난 본의 아니게 비주류가 되었다. 기왕 직장에 들어온 거 한 번 세게 나가보고 싶기도 했지만 내 주량은 객기 부릴 수 있는 주량이 아니었다. 내가 쏠 수 있는 실탄은 3발 정도… 한 발은 모두들 원샷 할 때, 한 발은 부장, 한 발은 팀장을 위해서 가지고 있었다. 가끔 피치못할 사정으로 한 두발 정도를 더 쏴야 할 경우가 있는데 내 주량을 넘어서므로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내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았다. 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난 마치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기다렸던 것처럼 회식 내내 내 타겟을 노려보며 적당한 때를 살핀다. 연공서열 대로 고참 팀장부터 부장과 잔을 바꿔가며 건배를 하는데 어디 나와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수, 나이, 직급 등을 고려하여 서열이 있는 것도 재미있다. 눈치없는 술 좋아하는 후배나 중간에 취해버린 다른팀 팀장을 피해 내 사격 순서에 정확하게 타켓에 건배를 신청해야 하는 것이다.
맛보기
회식 1차전에서 부장과 팀장을 성공적으로 보낸 어느 날, 부서내 골드미스가 새로운 문물을 알려주겠다고 나를 포함한 만만한 남자직원 3명을 어느 위스키 바로 데려갔다. 자리에 앉으니 남자 웨이터가 나와서 위스키 종류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 줬다. 이 가게는 메뉴가 없고 원하는 맛을 알려주면 그것에 맞춰서 위스키를 주는 가게라고 했다. 그 때 들었던 설명으로 난 위스키가 오크통에서 숙성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설명이 길기도 했고, 무슨 말인지도 대부분 못 알아들었을 뿐더러 그날은 마침 두 아이를 봐주시던 어머니가 폭발해서 내게 빨리 오라고 전화를 하셨기 때문에 그 바에서 오랜 시간 머무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위스키가 너무나 궁금했다. 다시 바를 가서 먹기는 돈이 없었고, 마트에서 한두 개씩 시중의 유명한 위스키를 사서 맛보기 시작했다. 처음 위스키를 먹었을 때, “와~ 이거다.” 한 느낌이 든 것은 아니었다. 몇몇 위스키를 제외하고는 내 입맛에 안 맞았다. 하지만 위스키는 사 놓았고 내 주량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와인과는 달리 위스키는 한번 열어두고 보관한다고 해서 맛이 변하지 않았다.
소울푸드
육아휴직을 한 이후로 아내의 가사노동 참여빈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해한다. 나도 직장생활 해 봤으니까. 그런데 토요일날 누워있는 것을 보면 열 받는다. 어쩌면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서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가끔은 음식 맛이 없다느니 청소가 안되어 있다는 둥의 잔소리도 한다. 자기가 하면 될텐데… 그때마다 요즘은 위스키를 한잔씩 마신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분함이 가라앉는다. 난 나의 소울푸드를 찾은 것이다. 물론 분함이 가라앉는 것은 잠시 뿐이다. 하지만 괜찮다. 난 이미 여러 병의 위스키를 샀다. 아무리 분하더라도 왼쪽에서 오른쪽 병으로 이동하면서 한잔씩 마시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사람에게 상처받고 술에게 잠시나마 위로 받는다. 주량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한잔 사이사이의 텀은 꽤 길다. 하지만 이제서야 알고 느끼게 되었다. 한 잔씩 먹으니 술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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