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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을 보내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의미_롬7장

교회는 무엇을 믿는 것인가? 

교회는 무엇을 믿고 가르치는 곳일까? 단순하게는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과 죄에서 인간을 구원한 예수님을 믿는 종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죄에서 인간을 구원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나는 죄를 용서받았고 앞으로도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개념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았다. 단순한게 싫어서 좀 더 깊게 들어가보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결론이 나와 버렸다. 로마서 7장~8장에서는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죄라는 측면에서 하고 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로마서 7장은 율법과 죄의 측면에서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선 본문은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에서 자유로워 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마치 피의자가 죽으면 검찰이 더 이상 수사 및 기소를 진행하지 않고 공소권 없음으로 사실상 사건을 종결하는 것처럼, 우리는 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해결되어 율법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 2절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길게 말했지만 결론은 율법이 쓸데없다는 것

‘예수님 이후로는 율법이 쓸모 없어졌으니까 이젠 갖다버리자’ 라고 단순하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바울은 장중반부터는 무척이나 헷갈리게 율법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했고 율법이 쓸모없는게 아니라 사람들의 역량이 율법을 지킬 수준이 안된다.’ 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차마 쓸모없다고 말하기 민망한지 길게 설명했지만, 앞에 이미 쓸모없다고 해놓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로마서 7장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왜 버려졌나?

앞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기능이 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셈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단순히 ‘세상을 만든 누군가가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믿는 것 이외에도 안식일도 지키고 우상도 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세상을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믿는다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그 믿음을 무척이나 의심하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대로 지키기에는 너무 기준이 높았고, 사람들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가짜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율법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께 따진 것처럼 율법은 어느새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용도로 변질되고 만다. 어떤 의미로 율법은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가복음 2장 23~27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여우 죽은 골에 호랑이 들고

예수님이 죄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골치 아픈 율법도 폐기되었으니 이제 기독교라는 종교의 난이도는 무척이나 낮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는 말씀처럼, 이제는 막 살아도 되는 면허라도 주어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한다. 로마서 13장 10절에서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교회 나가고 십일조를 내는 것은 쉽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율법이 지키기는 불가능하지만 명확한 맛은 있었는데 예수님이 완성한 새 율법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난이도를 말하기조차 어렵다. 


이번 생엔 틀렸어

드디어 로마서 7장 후반에서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로마서 7장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게 율법을 어기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섬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야기한다. 교회에서 일부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성화’를 통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죽기전엔 못고친다’며 당당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번 생엔 틀렸어.’ 라는 바울의 고백은 마치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오지 못한 삭개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까지 속이던 바리새인보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절망했던 삭개오를 예수님은 더 좋게 보셨다. 예수님이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내다버린 율법은 없어졌지만, 예수님이 새로 준 ‘사랑’이라는 과제는 내 머리를 쥐어뜯게 만든다. 방금 내다버린 율법 못지않게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미워 죽겠음을 시인할 수 밖에는 없다.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사랑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지만 역시나 이번 생은 틀렸음을 시인하면서 또 노력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다. 

7장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율법 때문에 말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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