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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을 보내며

우상이 되어버린 예배참석

교회를 나가지 않는 크리스천

난 30년이 넘는 시간을 크리스천으로 살았고, 아직도 크리스천이다. 하지만 매주 교회에 참석하지 않은지는 3년 정도 되었다.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발길을 딱 끊은 것은 아니고, 교회에 나가는 횟수가 자연적으로 줄어들었고 지금은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불교를 믿는 사람의 상당수가 매주 절에 가지 않는 것처럼 나도 매주 교회에 나가지 않을 뿐이다. 아직도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그 누군가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교회에서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지는 모르겠다.

 

공감되지 않는 외치는 소리

그러던 중 집안의 어떤 어른으로부터 꾸중을 받았다. 주일에 자신의 집에 방문한 우리를 보고 요즘 교회 안 나가느냐고 물으시며, ‘마지막 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주일성수를 해야한다고 했다. 나도 교회에 열심히 나갔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줄 알고 있다. 이어지는 어르신의 말씀에 반론없이 잘 넘겼지만, 사실 그 말은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인가

이런 갈등은 집에서도 있다. 아내는 이제는 교회에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에게 닦달할 때가 있다. 내가 교회에 가지 않기 시작한 것은 최근 교회의 가르침이 나와는 맞기 않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는 성추행을 하다가 쫓겨났음에도 마치 주방장이 나와서 다른 중국집을 차리듯이 옆동네에서 다시 목회를 하고 있고, 한국의 대표적인 몇몇 교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재벌이 세습을 하듯, 북한이 백두혈통으로 그 권력을 이어 가듯, 자신의 가업으로의 교회를 세습하고 있다. 일부 교회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교계에서 그런 비행을 찍어내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이다. 교계에서 목사는 그 지위를 계속 인정받고 신도들도 말씀이 좋다면서 그 교회를 계속 다닌다. 이미 기독교는 자정능력을 잃었고 교회는 목사님들의 비즈니스 모델로 전락해 버렸다. 목사님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설교를 하나 교인들은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저런 사업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산을 옮길 만한 거대한 믿음이다. 성경에도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다.

 

교회참석은 주일성수인가?

앞서 언급한 아내의 닦달이 내 입장에서는 황당한데, 아내도 내 생각에 상당부분 동의를 했음에도 아직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럼에도 혼자서라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은 또 하나의 미스터리이긴 하다. 주일성수를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동의어로 보는 고정관념이 사실 나에게도 있다. 성경에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현재 나는 그 주일 성수가 교회에서 전혀 공감되지 않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성경의 말씀대로 어떤 방식이든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주일성수를 하고 싶다. 어찌 보면 이 글도 주일성수의 한 방법이다.

 

우상이 되어버린 교회 참석

정해진 시간을 할애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였겠지만 어느 순간 교회가 커지면서 모이는 것, 그 자체를 믿게 되었다. 전도할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전하지 않고 교회에 나오라고 권한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기독교 교리를 전부 전달하기 어려워서 교회에서 긴 시간 동안 이야기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전도문구이긴 하다. 하지만 막상 교회에서도 기독교에 대해서 들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 교회에 참석해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단이 아닌 정통 기독교계에서 대놓고 벌어지는 목사들의 비행은 이러한 광신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을까?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시간 중, 대부분의 주일을 난 교회에서 보냈다. 일부 크리스천들이 지키는 엄격한 주일의 규칙(예를 들면, 주일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든지, 일요일 0시부터 예배 이외의 활동을 하지 않는 등)을 지킨 것은 아니지만 매주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활동이 무척이나 제한되었다. 하지만 나는 소중한 주일을 예배에 투자해서 과연 하나님을 만났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교회에 가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그 시간에 내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적극적인 해석

지금 생각해보면 목사님의 말씀은 직장생활을 하는 나와는 좀 괴리가 있었고 목사님의 개인적인 시각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물론 개인의 시각이 반영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에 쓰여졌고, 이야기나 비유로 된 성경의 특성상 읽는 사람의 해석이 들어갈 수 밖에는 없다. 아마 목사님은 선의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목사님이 나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많이 만났다는 확신이 없는 지금, 내가 선의를 가지고 내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이라고 확신한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온다고 성경에 쓰여있지만 화자가 목사님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목수였지 목사님은 아니었다.

 

다른 대안을 찾아서

교회에서의 모임과 예배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배에 대한 광신이 현재 기독교의 괴물을 만들었으며, 그 괴물들이 하는 설교는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하지만 더 이상 내게 전통적인 예배의 포맷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믿음을 키우는 방법일 수 있지만 기존 예배 포맷은 내게 너무나 답답하다. 목사님은 선의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해서 하는 설교이겠지만 내게는 상당부분 들었던 내용이고 자극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신선한 외부의 자극을 통해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살길을 찾아 길을 나선 것이다.